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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4권, 서약을 깨뜨린 화살 한 발

by 헤이토비 2026. 8. 31.

4권은 신들의 회의에서 시작해, 결국 인간 세계의 서약을 깨뜨리는 화살 한 발로 이어집니다. 3권 끝에서 메넬라오스의 승리가 선언됐음에도 끝나지 않은 갈등이, 이번엔 신들의 뜻에 따라 전면전으로 확산됩니다. 짧게 이어졌던 평화가 어떻게 깨지는지, 그 과정을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신들의 회의와 제우스·헤라의 거래


제우스는 황금 마루 위에서 열린 회의에서, 메넬라오스를 돕는 헤라와 아테네는 구경만 하는데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구해냈다며 짐짓 비꼽니다. 이에 헤라는 크게 분노하며, 프리아모스와 트로이 백성들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그러시냐 따져 묻는 제우스에게 트로이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제우스는 트로이의 멸망을 허락하되, 자신이 헤라가 아끼는 도시를 멸망시키려 할 때도 막지 말라고 조건을 겁니다.

헤라는 아르고스와 스파르타와 뮈케네라도 제우스가 멸망시키려 한다면 막지 않겠다고 답합니다. 그러고는 제우스가 아테네에게 트로이 쪽이 먼저 서약을 깨도록 부추기라고 지시합니다. 인간들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결정이, 이렇게 신들의 흥정 속에서 내려집니다.

판다로스의 화살, 깨진 서약


아테네는 안테노르의 아들 라오도코스의 모습으로 변신해 트로이의 명궁 판다로스를 찾아갑니다. 메넬라오스를 쏘아 맞히면 트로이아인들에게서 사랑받고 영광을 얻을 것이며, 특히 알렉산드로스 왕에게서 큰 선물을 받을 것이라 부추깁니다. 판다로스는 산양 뿔로 만든 활을 뽑아 신성한 도시 젤레이아로 돌아가면 헤카톰베를 바치겠다는 기도를 올린 뒤 화살을 날립니다.

아테네는 화살을 허리띠와 가슴받이가 겹치는 곳으로 유도합니다. 화살은 방어구를 뚫었지만 살갗에만 상처를 내어, 메넬라오스는 목숨을 건집니다. 그러나 이 한 발로, 신들 앞에서 맺었던 서약은 완전히 깨져버립니다.

메넬라오스의 부상과 치료


아가멤논은 동생의 검은 피를 보고 몸서리치며 손을 맞잡고 탄식합니다. 자신이 동생에게 죽음을 맞게 하려고 희생 제물을 준비한 셈이라며 자책하고, 만약 메넬라오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헬레네만 트로이아인들의 자랑거리로 남긴 채 자신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아르고스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서약을 먼저 깬 트로이아인들에게는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이라 다짐합니다. 전령 탈튀비오스를 통해 의사 마카온이 급히 불려오고, 그는 화살을 뽑아낸 뒤 피를 빨아내고 고통을 달래는 약초를 정성껏 뿌려줍니다. 메넬라오스가 치료받는 사이 트로이아군이 다가오고, 그리스군도 다시 무장을 갖추며 전투를 준비합니다.

아가멤논의 부대 순회


아가멤논은 전차에서 내려 부대를 돌며 병사들을 격려하거나 매섭게 질책합니다. 열의를 보이는 이도메네우스와 두 아이아스, 노장 네스토르에게는 흡족한 마음으로 칭찬을 건넵니다.

반면 전투를 주저하는 병사들은 넋을 놓고 서 있는 새끼 사슴에 비유하며 질책합니다. 이어 오뒷세우스에게는 잔치에서는 앞장서면서 전투에서는 왜 다른 이들을 기다리느냐고 질책합니다. 오뒷세우스가 강하게 반발하자 아가멤논은 말을 거둡니다. 디오메데스에게는 아버지 튀데우스의 용맹을 들려주며, 아버지만 못하다며 몰아붙입니다.
디오메데스는 왕의 질책을 존중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대신 곁에 있던 스테넬로스가 나서서 우리가 아버지들보다 훨씬 낫다고 당당히 반박합니다.

전투의 시작


양군이 마침내 한곳으로 몰려들며 방패와 창이 맞부딪히고, 엄청난 굉음이 솟아오릅니다. 죽어가는 자들의 통곡과 죽이는 자들의 함성이 뒤섞이며, 피가 대지를 타고 흐르기 시작합니다. 안틸로코스가 트로이아인 에케폴로스를 창으로 찔러 첫 전사자를 내고, 아이아스는 젊은 시모에이시오스를 쓰러뜨립니다.

이어 전우를 잃은 오뒷세우스도 분노에 휩싸여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 창을 던집니다. 아폴론은 트로이의 성채에서 이를 내려다보며 트로이아인들에게 물러서지 말라고 호통을 칩니다. 아테네 역시 아카이아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뒤처지는 병사들을 격려합니다. 신들이 저마다의 편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가운데, 짧았던 평화는 끝나고 전쟁이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신이 인간의 약속을 가지고 노는 것


4권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남은 건, 서약을 깨는 결정이 정작 인간이 아니라 신들의 흥정에서 내려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헤라는 자신이 아끼는 도시를 내주면서까지 트로이를 멸망시키려 했고, 판다로스는 아테네가 내민 영광과 보상의 유혹에 넘어가 화살을 쐈습니다. 정작 그 화살 하나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인간들인데, 그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인간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신들에게는 도시 하나, 명예 한 조각을 두고 벌이는 흥정이, 인간에게는 생사가 갈리는 문제가 된다는 그 낙차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4권을 덮으며


《일리아스》 4권은 짧았던 평화가 어떻게 다시 전면전으로 번지는지 보여줍니다. 신들의 회의에서 시작된 결정이 판다로스의 화살 한 발로 이어지고, 그 한 발이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확산됩니다. 서약을 깨도록 부추기고 승인한 것은 신들이었지만, 그 대가는 고스란히 인간들이 치르게 됩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