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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6권, 전쟁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얼굴

by 헤이토비 2026. 9. 1.

《일리아스》 6권은 격렬한 전투 장면으로 시작해 트로이아 성안의 가장 인간적인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디오메데스와 글라우코스가 창을 거두고 우정을 나누는 이례적인 순간, 그리고 헥토르가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튀아낙스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이 권의 핵심입니다. 전쟁 영웅 헥토르의 또 다른 얼굴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아드레스토스의 죽음, 전쟁의 냉혹한 논리

전차가 위성류 가지에 걸려 부서지면서 아드레스토스는 흙먼지 속에 나뒹굴고, 메넬라오스가 창을 겨눕니다. 그가 무릎을 붙들고 몸값을 치르겠다며 애원하자 메넬라오스는 마음이 흔들리지만, 아가멤논이 달려와 "뱃속의 아이조차 살려두지 말라"며 직접 그를 죽입니다.

네스토르도 전리품에 정신 팔지 말고 먼저 적을 모두 처치하라며 병사들을 독려합니다. 이 장면은 전쟁의 냉혹한 논리를 압축해서 보여주며, 이후 이어지는 인간적인 장면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헬레노스의 조언, 헥토르 도성으로 향하다

트로이아군이 밀리자 예언자 헬레노스는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에게 다가가 조언합니다. 아이네이아스는 전열 앞에 서서 병사들을 다잡고, 헥토르는 도성으로 들어가 어머니 헤카베가 지체 높은 부인들을 이끌고 아테네 신전에 가장 아름다운 옷을 바치며 기도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습 송아지 열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다 서약하고, 트로이아인들과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디오메데스를 신성한 일리오스로부터 멀리 떼어놓아 달라고 빌라는 당부였습니다. 헥토르는 이 조언을 따라 무장을 갖춘 채 도성으로 향합니다.


디오메데스와 글라우코스, 창 대신 우정을 나누다


전장에서 마주친 디오메데스는 글라우코스에게 신인지 인간인지 묻고, 글라우코스는 조상 벨레로폰테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뤼키아로 추방됐지만 키마이라를 처치하고 아마존과의 전투, 매복까지 이겨낸 인물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디오메데스는 창을 대지에 꽂아두고, 두 사람의 조상이 오래전 서로를 환대했던 손님 사이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기뻐하며 무장을 맞바꾸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무장을 교환합니다. 이때 글라우코스는 백 마리 소의 값어치가 있는 황금 무장을 아홉 마리 소 값어치의 청동 무장과 바꾸는데,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그의 분별력을 빼앗았다고 덧붙입니다.


헤카베의 기도와 파리스를 향한 질책

성에 도착한 헥토르는 어머니 헤카베가 권하는 포도주를 "지쳤을 때 오히려 힘이 빠진다"며 거절합니다. 대신 지체 높은 부인들을 이끌고 아테네 신전에 가서 가장 값진 옷을 여신의 무릎에 올리고, 한습 송아지 열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노라 서약하며 기도하라고 청합니다.

헤카베는 헥토르의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여사제 테아노가 아테네에게 기도를 올리지만, 여신은 고개를 저으며 외면합니다. 한편 헥토르는 전장에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무장만 손질하던 동생 파리스를 찾아가 "백성들이 죽어가는데 너는 여기 앉아 있느냐"며 매섭게 질책합니다. 파리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헬레네의 재촉까지 더해져 곧 전장으로 나가겠다고 답합니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성문에서의 마지막 대화

집에서 아내를 찾지 못한 헥토르는 그녀가 아들과 유모를 데리고 성벽 위 탑으로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스카이아이 문에서 마주칩니다. 안드로마케는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모두 아킬레우스에게 잃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헥토르에게 성벽 안에 머물러달라 간청합니다.

헥토르는 트로이아의 운명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아들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되어 훗날 "이분이야말로 아버지보다 낫다"는 말을 듣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투구의 말총 장식을 보고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헥토르는 웃으며 투구를 벗어 땅에 내려놓습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한 그는 다시 투구를 쓰고, 안드로마케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눈물 속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영웅이 아닌 한 남자, 한 아버지의 얼굴


6권을 읽으며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전투 장면이 아니라 스카이아이 문 앞 장면이었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은 분들과 차를 마시며 이 장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헥토르의 마음은 영웅만의 것이 아니라,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느낄 아픔이라는 데 모두 공감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이미 받아들였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다른 길을 바랐던 마음. 투구를 보고 우는 아기 앞에서 잠시 투구를 벗어 든 헥토르는, 시대를 넘어 자식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6권을 덮으며


6권은 전쟁의 냉혹함과 인간적인 정, 그리고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함께 담아냅니다. 특히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장면은 《일리아스》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입니다. 다음 7권에서는 헥토르가 전장으로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