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최전선을 정비했던 아카이아군이지만, 아폴론이 직접 나서는 순간 그 방어선은 허무할 만큼 쉽게 무너집니다. 신 하나가 발로 툭 건드린 참호가 이렇게 맥없이 뚫릴 일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전쟁은 참호를 넘어 함선 갑판 위까지 번지게 됩니다.

아폴론, 참호를 무너뜨리다
헥토르는 죽은 자의 무장은 신경 쓰지 말고 배를 향해 곧장 돌진하라 명하며, 대열을 이탈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조차 불태우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때 아폴론이 발로 참호 가장자리를 가볍게 무너뜨려 창을 던져도 좋을 만큼 넓은 길을 열어주는데요, 마치 아이가 모래성을 발로 허물듯 손쉬운 장면이었습니다.
트로이아군은 이 길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갑니다. 네스토르가 별이 빛나는 하늘을 향해 배들을 지켜달라 애타게 기도하자, 제우스는 천둥으로 응답하고 트로이아군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응원으로 받아들여 더욱 거세게 몰아칩니다.
아이아스와 헥토르, 서로의 전우를 쓰러뜨리다
한편 부상당한 에우뤼필로스를 돌보던 파트로클로스는 전황의 비명 소리를 듣고 결국 아킬레우스에게 참전을 간청하러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사이 아이아스는 배에 불을 지르려던 헥토르의 사촌 칼레토르를 창으로 찔러 쓰러뜨립니다.
이를 본 헥토르는 그 시신을 아카이아인들에게 빼앗기지 말라며 트로이아인들과 뤼키아인들에게 호통칩니다. 이어 아이아스를 겨눠 창을 던지지만 빗나가, 대신 아이아스의 동료였던 뤼코프론을 맞히고 맙니다. 퀴테라 출신으로 아이아스 집안에 몸을 의탁해온 그를, 아이아스는 친형제처럼 여겨온 사이였습니다.
테우크로스의 활이 꺾이다
친형제처럼 여기던 동료를 잃고 슬퍼하던 아이아스는 테우크로스에게 활로 복수해달라 청합니다. 테우크로스는 풀뤼다마스의 전우인 클레이토스를 뒤에서 쏘아 맞혀 쓰러뜨리는데요, 이번엔 헥토르를 직접 겨냥합니다.
자칫 전쟁의 흐름 전체를 바꿀 수도 있었던 그 화살은, 그러나 활시위를 제우스가 끊어버리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버립니다. 활과 화살을 떨어뜨린 테우크로스는 몸을 떨며 신의 개입을 직감하고, 아이아스의 권유에 따라 활을 내려놓고 창과 방패를 들어 백병전에 나섭니다.
함선 앞의 백병전, 무너지지 않는 아카이아군의 저항
활이 꺾인 것을 본 헥토르는 제우스가 함께한다며 사기를 북돋우고, 아이아스도 이제 믿을 것은 두 주먹뿐이라 외칩니다. 메게스가 크로이스모스를 쓰러뜨리자 돌롭스가 덤벼들지만 메넬라오스가 등 뒤에서 그를 꿰뚫고, 헥토르가 질책해 전선에 끌어들인 멜라닙포스는 결국 안틸로코스의 창에 전사합니다.
제우스는 헥토르에게 계속 힘을 불어넣고 아카이아인들의 기백은 깎아내리지만, 이들은 벼랑처럼 버티며 좀처럼 물러서지 않습니다. 네스토르는 병사들에게 아내와 자식을 떠올리라며 무릎 꿇고 애원하고, 아테네가 안개를 걷어내자 아이아스가 스물두 완척 장대를 손에 쥐고 갑판 위를 누비며 전우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헥토르, 프로테실라오스의 배를 붙잡다
마침내 헥토르는 한 척의 뱃고물을 붙잡습니다. 트로이아 원정 최초의 전사자 프로테실라오스를 이곳까지 실어왔지만, 끝내 고향으로 데려가지는 못한 바로 그 배였습니다.
이 배 하나를 둘러싸고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과 투창 대신 도끼와 칼, 양날 창이 맞붙는 처절한 육박전이 벌어지고, 헥토르는 불을 가져오라 외치며 제우스가 마침내 되갚을 날을 주셨다고 소리칩니다. 아이아스는 쏟아지는 무기에 밀려 일곱 걸음 폭의 발판 위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면서도 자리를 지키며, 배들 가까이에서 벌어진 백병전에서 열두 명을 창으로 찔러 쓰러뜨립니다.
신들의 전쟁 속, 홀로 버티는 인간 (헤이토비의 시선)
15권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신들이 전쟁의 흐름을 결정하는 가운데 홀로 함대를 지키는 아이아스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우스가 전세를 트로이아 쪽으로 기울이고 아폴론이 참호를 무너뜨리는 상황에서도, 아이아스는 일곱 걸음 폭의 발판 위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며 끝까지 버텨냅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아이아스라는 인물이 다른 영웅들과 결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명예와 분노로, 헥토르가 조국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움직인다면 아이아스는 그저 물러날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의지로 싸웁니다.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어도 끝까지 저항하는 그의 모습에서, 신들의 뜻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보았습니다.
15권을 덮으며
15권은 한 신의 잠에서 깨어남으로 시작해, 한 인간의 사투로 끝났습니다. 제우스의 말 한마디에 전쟁의 결말까지 이미 정해져버렸지만, 그 정해진 길목에서도 아이아스는 일곱 걸음 폭의 발판 위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신들이 판을 짜고 인간이 그 판 위에서 버텨내는 구도가 이번 권에서 유독 선명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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