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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16권 A, 갑옷을 빌리다

by 헤이토비 2026. 9. 13.

15권 끝에서 아이아스가 홀로 버티던 함선 앞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쏟아지는 무기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일곱 걸음 폭의 발판 위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던 그 안간힘은, 결국 헥토르가 배의 고물을 손에 넣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파트로클로스가 눈물을 흘리며 아킬레우스를 찾아오면서, 마침내 전세를 뒤집을 결정적인 장면이 시작됩니다.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의 눈물을 보다


파트로클로스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자, 아킬레우스는 그를 보고 가여워하며 먼저 말을 건넵니다. 엄마 옷자락을 붙잡고 안아달라 졸라대며 길을 막아서는 철부지 여자아이 같다고 놀리듯 묻는데, 뮈르미돈인들에게나 자신에게 알려야 할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혼자 프티아에서 무슨 소식을 들은 건지 캐묻습니다.

각자의 아버지인 메노이티오스나 펠레우스의 부고라면 정말 애통할 일이라면서도, 정작 갑판이 잘 덮인 배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격전을 보고 우는 것 아니냐며 짐짓 둘러대는 듯한 말투를 덧붙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에두르는 이 대사는, 깊이 신음하며 무겁게 입을 여는 파트로클로스의 모습과 대비되어 앞으로 벌어질 비극의 무게를 미리 암시하는 듯합니다.

파트로클로스의 하소연과 아카이아군의 참상


파트로클로스는 아카이아군의 참담한 상황을 전합니다. 디오메데스는 화살에 맞았고, 창으로 이름난 오뒷세우스와 아가멤논도 창에 찔렸으며, 에우뤼퓔로스마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약초에 밝은 의사들이 상처를 아물게 하려 애쓰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킬레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며, 그가 품고 있는 노여움이 자신마저 사로잡는 일만은 없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아버지 펠레우스도, 어머니 테티스도 이렇게까지 매정하지는 않았을 거라며, 그를 낳은 건 차라리 반짝이는 바다와 깎아지른 바윗덩어리일 거라고, 기질에는 다정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고 날카롭게 몰아붙입니다.

파트로클로스의 청, 아킬레우스의 허락과 경고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에게 갑옷을 빌려주고 뮈르미돈 군사를 붙여달라 간청합니다. 트로이아군이 그를 아킬레우스로 착각하기만 해도 지친 아카이아군이 숨을 돌릴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아직 기운이 남은 군사들이라면 적을 손쉽게 배들에서 도시 쪽으로 몰아낼 수 있으리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이를 허락하면서도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배들에서 트로이아군을 몰아내고 나면 즉시 돌아와야 하며, 성벽까지 추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올림포스의 신들, 특히 트로이아를 아끼는 아폴론이 그 틈을 타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배들에 한 줄기 빛만 비춰주고 곧장 돌아오라는 당부였습니다.

뮈르미돈 군의 출전 준비


아킬레우스는 신뢰하는 다섯 지휘관을 중심으로 뮈르미돈군을 정비합니다. 메네스티오스, 에우도로스, 페이산드로스, 포이닉스, 알키메돈이 각각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무장을 갖춘 이들은 먹이를 뜯어 배를 가득 채운 늑대 떼처럼 사나운 기세를 드러냅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노여움에 사로잡혀 전투에서 물러나 있던 동안, 전우들이 던졌던 원망도 되새깁니다. “고집불통 펠레우스의 아드님, 어머님은 당신을 쓸개즙 먹여 기르셨구려”라고 자신을 비난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전투에 나설 때가 왔다고 뮈르미돈군을 독려합니다.

아킬레우스의 기도, 제우스의 반쪽 허락


막사로 돌아간 아킬레우스는 테티스가 전해준 귀한 잔을 꺼내 유황으로 닦고 깨끗한 물로 헹군 뒤, 자신 말고는 어떤 인간도 이 잔에 포도주를 받아본 적 없다는 그 특별한 잔에 술을 채웁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어가며 파트로클로스가 배들로부터 싸움을 물리치고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 기도하지요. 제우스는 그 기도를 들었지만, 반만 들어줍니다. 파트로클로스가 배들에서 전투를 몰아내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고개를 저어 거부한 것입니다.

예고된 반쪽짜리 승낙 (헤이토비의 시선)


가장 마음에 걸린 대목은 제우스가 아킬레우스의 기도를 절반만 들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파트로클로스에게 승리는 허락하면서도 살아 돌아오는 길은 막아버렸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작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출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배들만 구하고 돌아오라”는 아킬레우스의 당부가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고 읽어서인지, 그 말도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인간은 간절히 무사 귀환을 빌지만 신은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 그 엇갈림이 앞으로 닥칠 파트로클로스의 비극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서는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기까지, 정작 갑옷보다 무거웠던 것은 “배들만 구하고 돌아오라”는 아킬레우스의 당부와 제우스의 반쪽짜리 응답이었습니다. B에서는 이 무장을 갖춘 파트로클로스가 실제 전장에 나서 사르페돈과 맞붙게 됩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