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에서 사르페돈을 쓰러뜨리며 최고조에 이르렀던 파트로클로스의 기세는, 아킬레우스의 경고를 잊은 채 성벽까지 돌진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아폴론이 세 차례 막아서고 네 번째에는 직접 경고해야 했던 그 돌진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마지막 문턱이 됩니다.

경고를 잊은 파트로클로스, 성벽으로 돌진
사르페돈을 쓰러뜨린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신신당부를 완전히 잊은 채 계속 트로이아군을 추격합니다.
전열의 최전선을 찢어버리고 도로 배들을 향해 그들을 몰아붙이며, 아드레스토스, 아우토노오스, 에케클로스, 페리모스, 에피스토르, 멜라닙포스를 비롯해 엘라소스와 물리오스, 퓔라르테스까지 차례로 쓰러뜨리고 성벽 가까이까지 밀어붙입니다. 호메로스는 이 대목에서 직접 개입해, 그가 펠레우스의 아들이 남긴 당부를 마음에 새겼더라면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폴론의 세 차례 저지, 케브리오네스의 죽음
파트로클로스는 성벽 모퉁이를 세 차례나 타고 오르지만, 그때마다 아폴론이 방패를 밀쳐내며 막아냅니다. 네 번째로 달려들자 아폴론은 무섭게 소리치며, 트로이아 성은 그의 창은 물론 아킬레우스에게도 무너지도록 정해져 있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한편 갈피를 잡지 못하던 헥토르에게 아폴론이 외삼촌 아시오스의 모습으로 다가가 파트로클로스를 노리라 부추기고, 헥토르가 그 말을 따르자 파트로클로스도 마주 전차에서 뛰어내려 돌을 집어 듭니다. 그가 던진 돌은 헥토르의 마부이자 이복동생인 케브리오네스의 이마를 맞혀, 그는 전차에서 곤두박질치며 목숨을 잃습니다.
케브리오네스의 시신을 둘러싼 사투
케브리오네스의 시신을 두고 헥토르와 파트로클로스가 각각 머리와 발을 붙잡은 채 격렬하게 맞섭니다. 마치 사자와 멧돼지가 산꼭대기 작은 샘물 하나를 두고 사생결단으로 맞서듯, 두 사람 모두 물러서지 않고 팽팽한 힘겨루기를 이어갑니다.
주변에서도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 싸우며, 날 선 창과 화살이 그의 시신 곁에서 쉼 없이 쏟아집니다. 결국 파트로클로스 쪽이 우세를 점해 케브리오네스의 시신을 끌어내고 무장을 벗겨내는 데 성공합니다.
아폴론의 기습, 파트로클로스의 무장이 벗겨지다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아군을 향해 세 차례 돌진한 뒤 네 번째로 달려들던 순간, 마침내 생의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파트로클로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짙은 안개에 몸을 숨긴 아폴론이 뒤에서 다가와 그의 등과 넓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후려치자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리에서 투구가 벗겨져 말발굽 아래로 굴러떨어져 피와 흙먼지로 더럽혀집니다.
뒤이어 손에 쥐고 있던 창은 부서져 나가고, 뒤이어 손에 쥔 창이 부러지고, 방패와 가슴받이마저 벗겨집니다. 순식간에 무구를 모두 빼앗긴 파트로클로스는 정신이 흐려진 채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을 뿐, 더는 저항할 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에우포르보스의 일격과 헥토르의 마지막 일격
무방비 상태가 된 파트로클로스의 등을 다르다니아 청년 에우포르보스가 창으로 찌릅니다. 파트로클로스가 비틀거리며 전우들 쪽으로 물러나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헥토르가 달려들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꿰뚫습니다.
숨이 끊어져가던 파트로클로스는 헥토르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은 제우스와 아폴론이며, 자신을 쓰러뜨린 것은 운명과 아폴론, 에우포르보스이고 헥토르는 세 번째로 손을 댄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헥토르도 머지않아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게 되리라고 경고합니다. 헥토르는 코웃음을 치며 창을 뽑아 그를 걷어차 눕히고는, 누가 알겠느냐며 자신도 아킬레우스를 먼저 쓰러뜨릴지 모른다고 받아칩니다.
세 번의 손길이 겹쳐진 죽음 (헤이토비의 시선)
16권을 읽고 가장 오래 남은 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한 사람의 손이 아니라 세 단계로 나뉘어 이루어졌다는 구조입니다. 아폴론이 무장을 벗기고, 에우포르보스가 첫 상처를 내고, 헥토르가 마지막 숨통을 끊습니다. 파트로클로스 스스로 죽어가면서 이 순서를 정확히 짚어내는데, 그래서인지 헥토르의 승리가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진짜 승자는 신이었고, 헥토르는 이미 끝난 싸움에 마지막 도장만 찍은 셈이니까요.
성벽까지 가지 말라던 아킬레우스의 당부를 어긴 것이 결국 죽음으로 향하게 한 결정적인 선택이었다는 점도 뼈아팠습니다. 승리에 취해 경계를 넘는 순간 파멸이 찾아온다는 이 패턴은, 헥토르가 15권에서 보였던 폭주와도 닮아 있습니다.
16권을 덮으며.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전장에 나가 사르페돈을 쓰러뜨리고, 성벽을 세 번 두드린 끝에 세 번의 손길이 겹쳐진 죽음을 맞았습니다. 제우스조차 자기 아들을 구하는 대신 정해진 죽음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던 보면서, 신들조차 이미 흐르기 시작한 운명의 방향을 함부로 돌리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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