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끝에서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손에 쓰러진 직후, 17권은 그의 시신을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으로 막을 엽니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과 그가 입었던 아킬레우스의 무장은 양쪽 군대 모두에게 빼앗길 수 없는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메넬라오스가 홀로 시신을 지키는 장면부터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는 순간까지 살펴봅니다.

어미 소처럼 시신을 맴도는 메넬라오스
파트로클로스가 쓰러지자 메넬라오스는 그를 트로이아인들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 빛나는 청동으로 무장하고 선두 대열을 가로질러 나섭니다. 호메로스는 그의 모습을 갓 새끼를 낳은 어미 소가 송아지 곁을 맴도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메넬라오스는 창과 방패를 앞세우고, 다가오는 자는 누구라도 죽이겠다는 각오로 시신 곁을 지킵니다. 그때 판토오스의 아들 에우포르보스가 가까이 다가옵니다. 파트로클로스를 가장 먼저 창으로 맞혔던 그는 시신과 무장을 차지하려 메넬라오스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둘러싼 첫 대결이 시작됩니다.
에우포르보스의 도발과 메넬라오스의 응수
에우포르보스는 트로이아인들과 동맹군 가운데 자신보다 먼저 파트로클로스를 창으로 맞힌 사람은 없다며, 메넬라오스에게 시신과 무장을 그대로 두고 떠나라고 위협합니다.
메넬라오스는 크게 분노하며 사자와 표범, 멧돼지조차 판토오스의 아들들만큼 오만하지는 않다고 꾸짖습니다. 그는 이미 에우포르보스의 형 휘페레노르를 죽인 일을 상기시키며, 부모와 아내에게 돌아가지 못한 형과 같은 운명을 맞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에우포르보스는 형의 죽음에 대한 핏값을 치르게 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습니다.
어린 올리브나무처럼 쓰러진 에우포르보스
에우포르보스가 먼저 창을 던져 메넬라오스의 방패를 맞히지만, 청동을 뚫지 못한 창끝은 뒤로 휘어집니다. 이어 메넬라오스가 제우스에게 기도하며 창을 내지르자, 창끝은 에우포르보스의 부드러운 목을 꿰뚫습니다.
그는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카리테스 여신들의 머리칼처럼 아름다웠던 그의 머리카락은 피로 물듭니다. 호메로스는 그의 죽음을 물가에서 아름답게 자라던 어린 올리브나무가 갑작스러운 폭풍에 뿌리째 뽑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메넬라오스는 쓰러진 에우포르보스의 무장을 벗기려 합니다.
아폴론의 부추김과 돌아온 아이아스
이때 아폴론이 키코네스인들의 지휘자 멘테스의 모습을 하고 헥토르에게 다가가, 다른 곳에서 싸우는 동안 메넬라오스가 에우포르보스를 죽였다고 알려줍니다. 헥토르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메넬라오스는 홀로 맞설 것인지, 도움을 구할 것인지 갈등합니다.
결국 메넬라오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지키려면 두 아이아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물러납니다. 그는 곧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를 찾아 함께 돌아옵니다. 아이아스가 거대한 방패로 시신을 가로막자 헥토르는 물러나고, 메넬라오스와 아이아스는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지켜냅니다.
헥토르,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다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에게서 벗겨낸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트로이아 성으로 옮기던 동료들을 뒤쫓아가 그 무장을 넘겨받습니다. 자신이 입고 있던 무장은 트로이아인들에게 건네고, 아킬레우스의 신성한 무장으로 갈아입습니다.
이 무장은 본래 신들이 펠레우스에게 주었다가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본 제우스는 죽음이 가까이 왔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신과 같은 무장을 입은 헥토르를 보며 고개를 흔듭니다. 안드로마케가 그 무장을 받아 들 일은 없으리라고 예고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장이 헥토르의 몸에 잘 맞도록 하고 그에게 강한 힘을 불어넣습니다.
몸에는 맞았지만 운명에는 맞지 않았던 무장(헤이토비의 시선)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는 장면은 승리의 절정처럼 보입니다. 무장은 그의 몸에 꼭 맞았고, 제우스는 그에게 강한 힘까지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제우스는 헥토르가 전장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무장은 헥토르의 몸에는 맞았지만 그의 운명에는 맞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가장 빛나는 무장을 입는 순간 오히려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집니다. 전쟁에서 얻은 영광과 파멸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무장처럼 한 몸에 함께 걸쳐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7권 A를 덮으며
에우포르보스는 쓰러졌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둘러싼 진짜 격전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17권 B에서는 두 아이아스와 메넬라오스가 시신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안틸로코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싸움터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참고: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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