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아군이 참호까지 밀려났던 14권의 흐름이 무색하게, 15권은 시작부터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헤라의 계책에 속아 잠들어 있던 제우스가 이다산에서 눈을 뜨는 순간, 지금까지 아카이아군을 도왔던 흐름은 한순간에 끊기고 전황은 다시 트로이아 쪽으로 빠르게 기울기 시작하죠.

제우스, 잠에서 깨어 헤라를 질책하다
잠에서 깬 제우스는 참호 너머로 아카이아인들에게 쫓기는 트로이아군과,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헥토르를 발견합니다. 그는 헤라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내며 "신과 같은 헥토르의 전투를 가로막고 군대를 패퇴시켰겠다"며 몰아붙입니다.
이어 과거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곤경에 빠뜨렸던 일을 끄집어내는데요, 그때 제우스가 헤라의 두 발에 모루를 묶고 두 손을 황금 오랏줄로 묶어 창공에 매달아버렸던 일화를 상기시키며, 이런 속임수를 다시 쓴다면 그때의 고통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헤라의 해명과 제우스의 예언
헤라는 스튁스강에 걸고, 포세이돈이 트로이아군을 몰아붙인 것은 자신의 사주가 아니라 궁지에 몰린 아카이아인들을 가엾이 여긴 포세이돈 스스로의 판단이었다고 맹세합니다. 이 말에 제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헤라에게 이리스와 아폴론을 불러오라 명합니다.
그러고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예고하는데요,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전장에 내보낼 것이고, 파트로클로스는 제우스의 아들 사르페돈을 비롯한 많은 전사를 쓰러뜨린 뒤 헥토르에게 죽을 것이며, 결국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고 트로이아는 함락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테티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올림포스의 술렁임, 아레스의 분노
올림포스로 돌아온 헤라를 테미스가 먼저 맞이하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지만, 헤라는 구체적인 답을 피하고 신들에게 잔치를 시작하라 권하며 제우스의 진노가 누구에게든 똑같이 미칠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때 아들 아스칼라포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레스가 복수를 다짐하며 무장하려 하자, 아테네가 그를 강제로 주저앉히며 무모한 행동을 꾸짖습니다. 제우스의 뜻을 거스르다가는 신들 전체가 화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리스와 아폴론의 파견, 포세이돈의 굴복
제우스는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냅니다. 이리스의 명령을 들은 포세이돈은 격노하며, 자신도 제우스와 태생이 같고 명예도 대등하다고 항변합니다. 삼 형제가 제비를 뽑아 각각 하늘과 바다와 저승을 나눠 가졌으니 자신이 함부로 명령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이리스가 이 말을 제우스에게 그대로 전해야 하느냐고 묻자, 포세이돈은 한발 물러나 이번만큼은 양보하겠다며 바닷속으로 물러갑니다. 다만 훗날 트로이아가 정말 함락되지 않는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는 남깁니다.
아폴론, 헥토르에게 새 힘을 불어넣고 아카이아군을 동요시키다
아이기스를 손에 쥔 아폴론은 매처럼 빠르게 이다산을 내려와 헥토르를 찾아냅니다. 아이아스가 던진 바윗덩어리에 맞아 저승 문턱까지 갔었다는 헥토르에게, 아폴론은 제우스가 그를 지켜주고 있다며 용기를 북돋우고 전차수들을 몰아붙이라 재촉합니다.
기운을 되찾은 헥토르가 마치 우리를 뛰쳐나온 말처럼 전차수들을 몰아붙이자, 아카이아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사자를 본 사냥꾼들처럼 겁에 질려 물러섭니다. 이때 토아스가 나서서 아이아스, 이도메네우스, 테우크로스, 메리오네스, 메게스 등 정예 전사들이 앞을 막고 나머지 군사는 배 쪽으로 물러나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결국은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길 (헤이토비의 시선)
이번 A를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제우스가 잠에서 깨자마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통째로 예고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르페돈의 죽음, 파트로클로스의 출전, 헥토르의 최후, 트로이아의 함락까지 결말이 이미 이 시점에서 다 공개되는 셈이죠. 그런데도 이 예고가 긴장감을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이후 전개를 더 무겁게 만든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포세이돈이 이리스 앞에서 한참 항변하다가 결국 물러서는 장면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우스와 지위가 대등하다고 자부하면서도 결국 큰 그림 앞에서 양보하는 모습인데, 이게 꼭 신들의 위계질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옳고 그름과 별개로, 힘의 우열이 관계를 결정짓는 순간들이 있다는 걸 호메로스는 신들의 입을 빌려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 같습니다.
15권 A를 덮으며
15권 A는 제우스의 한마디로 올림포스와 전장이 동시에 요동치는, 서사의 축이 완전히 바뀌는 구간입니다. 잠에서 깬 신 하나가 눈을 뜨자마자 전쟁의 승패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죽음까지 미리 밝혀버립니다. B에서는 이제 그 예고가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참호가 뚫리고, 불길이 함선 코앞까지 다가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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