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14권은, 인간들의 전장과 신들의 침실이라는 두 무대가 동시에 펼쳐지는 권입니다. 방벽마저 무너진 절박한 상황에서 지휘관들의 고뇌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작 전세를 뒤집는 건 창칼이 아니라 헤라의 은밀한 유혹 작전입니다. 네스토르의 고민에서 시작해 헤라의 정교한 계략으로 끝나는 상편의 흐름을 정리해 봅니다.

네스토르, 전장의 함성에 창을 들다
네스토르가 포도주를 마시던 중 함성이 점점 커지는 것을 듣고, 마카온에게는 자리를 지키며 헤카메데가 데운 물로 굳은 피를 씻으라 권한 뒤 자신은 상황을 살피러 나섭니다. 아들 트라쉬메데스가 아버지의 방패를 가져간 탓에 아들의 방패를 대신 들고 창을 쥔 채 막사를 나선 네스토르는, 아카이아인의 방벽이 무너지고 트로이아인들에게 쫓기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는 폭풍 전 잠잠한 바다처럼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져 다나오스인들에게 갈지 아가멤논에게 갈지 고민하다가, 결국 아가멤논 쪽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아가멤논의 후퇴 제안과 오뒷세우스의 반박
부상당한 디오메데스, 오뒷세우스, 아가멤논이 배 곁에서 네스토르와 마주칩니다. 아가멤논은 헥토르가 예전에 공언했던 배 방화 위협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하고, 네스토르는 믿었던 방벽마저 무너져 전황을 가늠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이에 아가멤논은 맨 앞줄 배들을 바다로 끌어내려 밤이 올 때까지 정박시키자는, 사실상의 후퇴안을 제시합니다. 오뒷세우스는 매섭게 반발하며 지휘관이 할 말이 아니라고 꾸짖고, 지금 배를 끌어내리면 병사들의 전의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 경고합니다. 아가멤논은 결국 이 질책을 받아들입니다.
디오메데스의 설득과 포세이돈의 격려
아가멤논이 더 나은 계책을 청하자 디오메데스가 자신의 혈통(튀데우스의 아들, 오이네우스의 손자)을 밝히며 나서, 부상당한 몸이라도 사정거리 밖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싸움을 피하는 자들을 다시 전장으로 몰아넣자고 제안합니다.
지휘관들이 앞장서 나아가자 지진을 일으키는 포세이돈이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신해 아가멤논의 오른손을 잡고 격려합니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이 참상을 기뻐하겠지만 신들은 아직 아가멤논을 버리지 않았다며, 곧 트로이아군이 배와 막사를 떠나 도시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 예언하고 병사들의 심장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헤라, 아프로디테의 허리띠를 빌리다
올림포스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헤라는 오라비 포세이돈이 은밀히 아카이아인들을 돕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만, 이다산 정상의 제우스를 보고는 증오심이 솟구칩니다. 제우스를 욕망에 사로잡혀 잠들게 한 뒤 전세를 뒤집을 계략을 세운 그녀는, 헤파이스토스가 지어준 침실에서 몸을 씻고 향유를 바른 뒤, 아테네가 짜준 옷과 황금 브로치, 백 개의 술이 달린 허리띠, 오디를 닮은 장식이 세 개씩 달린 귀걸이, 햇빛보다 희고 빛나는 면사포로 치장을 마칩니다.
이후 아프로디테를 따로 불러, 오케아노스 부부의 불화를 풀어주러 간다는 거짓말로 욕정과 갈망이 담긴 형형색색 수놓인 띠를 빌립니다.
휘프노스를 설득해 제우스를 잠재우다
수놓인 띠를 얻은 헤라는 렘노스섬으로 가 잠의 신 휘프노스를 만나 제우스를 잠재워 달라 부탁하며 황금 보좌를 제안합니다.
휘프노스는 예전에 헤라의 부탁으로 제우스를 재웠다가 잠에서 깬 제우스에게 쫓겨 바다로 내던져질 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거절하지만, 헤라가 젊은 카리테스 여신 파시테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자 스튁스강에 걸고 맹세할 것을 요구합니다. 맹세가 끝나자 둘은 함께 이다산으로 향하고, 휘프노스는 제우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전나무 위에 새의 모습으로 숨습니다.
신들도 두려움 앞에서는 인간과 같았습니다 (헤이토비의 시선)
헤라가 제우스를 속이려는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창을 드는 대신 '아름다움'과 '욕망'이라는 사적인 무기를 전략적으로 쓴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아프로디테의 수놓인 띠를 빌리며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 걸 보면, 이건 단순한 부부싸움이 아니라 전쟁의 판도를 바꾸려는 정치적 술수입니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결국 힘보다 관계와 설득, 약간의 기만이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셈이지요. 휘프노스가 과거 제우스에게 쫓겨 바다로 내던져질 뻔했던 기억 때문에 망설이다가 파시테라는 구체적 보상 앞에서 마음을 돌리는 대목도 묘하게 인간적이었습니다.
14권 A를 덮으며
전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인간들의 전장과는 별개로 신들의 세계에서는 헤라의 정교한 유혹 작전이 준비됩니다. 다음 B편에서는 제우스가 완전히 잠든 틈을 타 포세이돈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며 전세가 어떻게 뒤바뀌는지 이어서 살펴봅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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