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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11권 B, 물러서는 방패, 움직이는 파트로클로스

by 헤이토비 2026. 9. 6.

아가멤논과 디오메데스가 물러난 뒤 헥토르의 기세는 더욱 거세집니다. 이번엔 아이아스마저 밀려나고, 아카이아군의 전열은 조금씩 배 쪽으로 밀립니다. 부상당한 마카온을 태운 전차가 아킬레우스의 눈에 띄면서, 훗날 벌어질 일의 첫 단추가 채워집니다.


 

아이아스의 후퇴


아이아스가 트로이아군을 몰아붙이자, 케브리오네스는 헥토르에게 지금 자리를 떠나 다른 격전지로 가자고 권합니다. 헥토르는 이 말을 따라 대열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정작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와의 정면 대결만은 한사코 피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서 지켜보던 제우스가 아이아스에게 갑자기 공포를 불러일으키자, 그는 몹시 놀라며 쇠가죽 일곱 겹을 댄 방패를 뒤로 돌리고 야수처럼 눈을 부릅뜬 채 무리를 뒤훑어보며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은 개들에게 쫓겨나는 사자와, 아이들을 밀어내다가 마지못해 물러나는 나귀에 잇달아 비유됩니다. 그럼에도 아이아스는 물러나다가도 몇 번씩 몸을 돌려 트로이아군을 막아섭니다.

에우리필로스의 분전과 부상

빗발치는 무기에 갇힌 아이아스를 예우아이몬의 아들 에우리필로스가 알아보고 달려와 곁에 서서, 백성들의 목자 아피사온을 창으로 찔러 무릎을 풀어버린 뒤 그의 무장을 벗기려 합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활을 당겨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화살을 명중시킵니다. 부러진 화살대가 허벅지를 짓누르자 에우리필로스는 죽음을 피하려 동료들 쪽으로 물러나며, 아르고스인들을 이끄는 이들에게 방향을 돌려 자신을 지켜달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마카온의 퇴장과 아킬레우스의 의문

그 사이 넬레우스의 말들은 땀을 흘리며 싸움터 밖으로 네스토르를 실어내고, 의사 마카온도 함께 끌어냅니다. 배의 고물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아인들이 마침내 위기에 몰려 자신에게 애걸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느끼며 파트로클로스를 불러냅니다.

이준석 번역본은 이 순간을 두고 "이렇게 그에게 재앙은 시작되고 있었다"고 짚어둡니다. 아킬레우스는 뒷모습만으로는 마카온과 꼭 닮았는데 말이 워낙 빨리 지나가 얼굴은 보지 못했다며, 네스토르에게 가서 부상자가 누구인지 확인해달라고 파트로클로스에게 부탁합니다.


네스토르의 회고와 조언


막사에 당도한 파트로클로스에게 네스토르는 곧장 답하는 대신, 필로스와 에페이오스인들 사이의 옛 전쟁, 그리고 자신이 물리오스를 죽이고 전차를 빼앗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습니다.

이어 그는 펠레우스가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항상 남들보다 앞서라" 당부했던 일과, 메노이티오스가 파트로클로스에게 "혈통은 아킬레우스가 위이나 나이는 네가 많으니 그를 잘 타이르라" 당부했던 일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아킬레우스를 설득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서라도 뮈르미돈 병사들을 이끌고 나서라고 권합니다. 트로이아인들이 그를 아킬레우스로 착각하면 지친 아카이아군이 잠시 숨 돌릴 틈을 얻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파트로클로스와 에우리필로스

네스토르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파트로클로스는 서둘러 돌아가던 중,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절뚝이며 땀과 검은 피를 흘리던 에우리필로스와 마주칩니다.

그를 가엾게 여긴 파트로클로스가 탄식하며 사정을 묻자, 에우리필로스는 이제 더는 아카이아인들을 지킬 방법이 없어 검은 배들 속으로 쓰러지게 생겼다며, 자신을 막사로 데려가 허벅지의 화살을 뽑고 따뜻한 물로 상처를 씻어달라고 애원합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를 부축해 데려가 쇠가죽 위에 뉘고 화살을 뽑아낸 뒤, 아킬레우스가 키론에게서 배웠다는 쓴 뿌리를 비벼 상처에 얹어 통증을 가라앉힙니다. 11권은 상처가 마르고 피가 멎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아킬레우스와 다른 마음

네스토르는 파트로클로스에게 아킬레우스를 움직일 방법을 말합니다. 아킬레우스가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의 갑옷을 입고 뮈르미돈 군을 이끌라는, 매우 현실적인 전쟁의 계산입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그 말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다친 에우리필로스를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지금껏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받은 모욕에 갇혀 전장에서 발을 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파트로클로스는 눈앞에서 피 흘리는 동료의 고통에 먼저 반응합니다. 아직 그가 전장에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작은 돌봄 속에서 훗날 그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게 되는 이유가 조금 보입니다.

 

11권 B를 덮으며


아이아스의 방패가 물러서고 네스토르의 말이 파트로클로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아킬레우스 없이 버텨온 아카이아군의 위기는 이제 파트로클로스를 전장 쪽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합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