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밝자 제우스는 아카이아인들의 배를 향해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내려보냅니다. 그녀의 외침에 힘입어 아가멤논은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고, 이날 하루는 유독 처절한 살육으로 시작됩니다. 아가멤논의 무훈과, 뒤이어 벌어진 디오메데스, 오뒷세우스의 사투를 정리합니다.

에리스의 함성과 아가멤논의 무장
에오스(새벽)가 몸을 일으키자 제우스는 오뒷세우스의 배 한가운데에 에리스(다툼)를 세웁니다. 그녀는 아이아스의 막사부터 아킬레우스의 막사까지 울릴 만큼 무시무시하게 고함을 질러 아카이아인들 각자의 심장에 전쟁을 치를 힘을 불어넣습니다. 병사들에게는 귀향보다 전쟁이 더 달콤하게 다가왔습니다.
아가멤논도 병사들에게 무장을 명하고, 자신도 정강이받이와 가슴받이, 은 못이 박힌 칼과 청동 원 열 개가 그려진 방패로 무장합니다. 방패 테두리에는 무서운 눈길의 고르고와 데이모스(공포), 포보스(패주)가 새겨져 있었고, 가슴받이는 예전에 키뉘레스가 손님맞이 선물로 준 것이었습니다.
제우스의 계략, 이리스의 전언
아가멤논이 한창 기세를 올리는 사이, 제우스는 이리스를 헥토르에게 보내 명을 전합니다. 아가멤논이 선두에서 폭주하며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이는 동안은 물러서 있되, 다른 군사들에게는 맞서 싸우라 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아가멤논이 창이나 화살에 맞아 전차에 뛰어오르고 나면, 그때는 헥토르에게 힘을 실어주어 배들에 이를 때까지, 해가 저물어 신성한 어둠이 내릴 때까지 살육하도록 허락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람처럼 빠른 이리스는 이 말을 그대로 전했고, 헥토르는 이를 거스르지 않고 일단 전차에서 뛰어내려 창을 휘두르며 진영을 구석구석 돌아 병사들을 독려하고 무시무시한 함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아가멤논의 부상과 퇴장
자신의 동생 이피다마스가 쓰러진 것을 본 코온이 슬픔에 눈이 뒤덮인 채, 신과 같은 아가멤논의 눈을 피해 창을 비스듬히 겨눠 팔꿈치 아래 팔 한가운데를 찔러 그를 떨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고 되려 코온에게 달려들어 목을 쳐서 죽였지만, 상처의 피가 식고 마르면서 산고를 안기는 여신들이 보낸 화살처럼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옵니다.
결국 그는 전차에 뛰어올라 마부에게 속이 빈 배들 쪽으로 말을 몰라고 명하고, 아르고스인들을 향해 이제 그대들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의 소란을 막아달라고, 조언자 제우스가 자신에게 온종일 트로이아인들과 싸우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크게 외치며 전장을 떠납니다.
헥토르의 재공격과 디오메데스의 부상
아가멤논이 물러나자 헥토르가 다시 기세를 올리며 트로이아군을 이끌고,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가 맞서 버팁니다. 디오메데스가 창으로 헥토르의 투구 정수리를 맞히지만 청동이 청동에 막혀 헥토르는 잠시 물러났다가 곧 전차로 돌아갑니다.
그 사이 디오메데스가 아가스트로포스의 무장을 벗기던 중, 일로스의 무덤 뒤에 매복해 있던 파리스가 그의 오른발등에 화살을 명중시킵니다. 파리스가 뛰쳐나와 자랑스레 조롱하자, 디오메데스는 활잡이 주제에 계집에게나 치근덕대는 겁쟁이라며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맞받아치지만, 결국 발에 화살이 박힌 채로는 더 버틸 수 없어 전차에 올라 물러납니다.
오뒷세우스의 고군분투
디오메데스마저 물러나자 오뒷세우스는 홀로 남겨지고,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그는 도망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지만 홀로 붙잡히는 것은 더 끔찍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잡습니다.
이내 힙파소스의 아들 소코스가 창으로 그의 방패를 뚫고 옆구리 생살을 찢어놓지만, 아테네가 창이 내장까지 닿지 못하게 막아주었고 오뒷세우스는 곧바로 반격해 소코스를 쓰러뜨립니다. 피를 본 트로이아인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몰려들자 오뒷세우스는 물러서며 세 차례나 크게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메넬라오스가 곁에 있던 아이아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나씩 비어 가는 전장
11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카이아군의 중심이 하나씩 전장에서 빠져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아가멤논이 먼저 부상으로 물러나고, 뒤이어 디오메데스마저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떠납니다.
두 사람이 버티던 자리에 홀로 남은 오뒷세우스는 쉽게 등을 보이지 않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우다 세 차례 크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모습은, 영웅의 용맹보다 무너지는 전열을 홀로 붙들어야 했던 한 사람의 막막함을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11권 A를 덮으며.
아가멤논의 부상으로 전투의 흐름은 뒤바뀌고, 아카이아군은 위기를 맞기 시작합니다. 11권이 긴 만큼 오늘은 여기까지 살펴보고, 나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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