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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12권 A, 참호 앞에 선 자들

by 헤이토비 2026. 9. 7.

아카이아인들이 쌓은 방벽 앞에서 트로이아군이 총공세를 준비하는 12권. 신들이 예고한 방벽의 최후, 참호를 넘는 방법을 둘러싼 논의, 무모하게 전차로 돌진한 아시오스의 실패, 그리고 흉조를 둘러싼 헥토르와 폴뤼다마스의 대립까지를 정리합니다.

무너질 운명의 방벽


전쟁 10년째 되는 해에 트로이아가 함락되고 아르고스인들이 고향으로 떠난 뒤 포세이돈과 아폴론은 이 방벽을 허물기로 합니다. 이다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강물을 한데 모아 아흐레 동안 방벽을 향해 흘려보내고, 제우스까지 나서 방벽을 바닷속으로 떠내려가도록 비를 퍼붓습니다.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남은 기틀마저 밀어버린 다음 강물의 흐름을 되돌려놓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헥토르가 살아 있고 아킬레우스가 여전히 노여워하며 트로이아가 무사한 동안, 아카이아인들의 방벽은 견고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다만 이 방벽은 신들에게 제대로 헤카톰베를 바치지 않고 세워졌기에, 오래 버틸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폴뤼다마스의 조언과 다섯 개 조


트로이아군이 참호 앞에 이르자 말들조차 겁을 먹고 나아가지 못합니다. 참호 양편에는 날카로운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어 전차로 돌파하기도, 뛰어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폴뤼다마스가 헥토르에게 다가와 전차를 참호 옆에 묶어두고 무구로 무장한 보병이 되어 다 함께 헥토르를 따라나서자고 제안합니다. 헥토르는 이 말을 반갑게 받아들여 전차에서 뛰어내리고, 다른 트로이아인들도 뒤따릅니다.

이들은 다섯 개 조로 나뉘는데, 헥토르·폴뤼다마스·케브리오네스 조, 파리스·알카토오스·아게노르 조, 헬레노스·데이포보스·아시오스 조, 아이네이아스·아르켈로코스·아카마스 조, 그리고 사르페돈·글라우코스·아스테로파이오스가 이끄는 조입니다.

아시오스의 무모한 돌진


다른 이들이 걸어서 참호를 넘는 동안, 아시오스는 폴뤼다마스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전차를 그대로 몰아 아직 닫히지 않은 관문으로 돌진합니다. 이 무모함은 훗날 이도메네우스의 창에 목숨을 잃는 결말로 이어질 운명이었습니다. 그 관문에서 라피타이의 용사 폴뤼포이테스와 레온테우스가 그를 맞아섭니다.

폴뤼포이테스는 다마소스를 창으로 꿰뚫어 쓰러뜨립니다. 퓔론과 오르메노스도 잇달아 쓰러뜨리고, 레온테우스는 힙포마코스와 안티파테스, 메논과 이아메노스, 오레스테스를 차례로 쓰러뜨립니다. 아시오스는 자신들의 기세로도 이들을 당해내지 못한 것에 분노하며 제우스에게 한탄합니다.

독수리와 뱀의 흉조


폴뤼다마스와 헥토르를 따르던 젊은이들이 참호 앞에서 돌파를 저울질하던 중, 높이 나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핏빛 뱀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왼쪽으로 날아드는 것을 목격합니다. 뱀은 몸을 뒤틀어 독수리의 목덜미 근처 가슴 언저리를 물었고, 독수리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뱀을 무리 한가운데 떨어뜨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버립니다. 트로이아인들은 이를 제우스가 보낸 흉조로 여기며 몸을 떱니다.

폴뤼다마스와 헥토르의 대립


폴뤼다마스는 이 흉조를 근거로 지금 배들을 공격하는 건 무모하다며, 설령 방벽을 뚫고 아카이아인들을 물러나게 하더라도 결국 대오를 갖추지 못한 채 되돌아오다 뒤처진 병사들을 잃게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헥토르는 새가 오른편으로 날든 왼편으로 날든 상관없다며, 오직 조국을 지키는 것만이 가장 좋은 징조라고 반박합니다. 그는 폴뤼다마스에게 만일 전투에서 물러나라고 다른 이를 부추기면 그 즉시 내 창에 맞아 죽을 것이라 경고하며 앞장서 나아갑니다. 그러자 제우스가 이다 산맥에서 폭풍을 일으켜 아카이아인들의 정신을 흐려놓고 트로이아인들에게 영예를 내립니다.

충고를 듣지 않는 용기


폴뤼다마스의 말은 겁이 나서 물러나자는 뜻이 아닙니다. 참호를 넘더라도 돌아오는 길에 진형이 흐트러지고 병사들이 많이 죽을 수 있다는 걱정입니다. 독수리가 뱀을 물고 날아가다 결국 떨어뜨린 모습도, 그에게는 경고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헥토르는 그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보다 더 좋은 징조는 없다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용감한 말이지만,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자기 생각을 꺾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폴뤼다마스는 뒤에 남을 병사들까지 보고, 헥토르는 지금 당장 방벽을 넘는 일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면의 헥토르가 너무 확신에 차 있어 더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12권 A를 덮으며

방벽은 이미 무너질 운명을 안고 세워졌고, 아시오스의 무모한 돌진은 관문 앞에서 가로막힙니다. 그리고 흉조 앞에서 갈라진 폴뤼다마스와 헥토르의 선택은, 이 전쟁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확신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