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에서 무장을 갖춘 파트로클로스가 마침내 전장에 나섭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걸치자 트로이아군은 아킬레우스가 노여움을 풀고 돌아온 줄 알고 동요하기 시작하고, 뮈르미돈 군의 첫 반격은 예상보다 훨씬 거셌습니다. 그 여파로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히면서, 결국 제우스의 아들 사르페돈까지 목숨을 잃게 됩니다.

파트로클로스, 트로이아군을 배에서 몰아내다
뮈르미돈 군은 벌집을 건드린 땅벌 떼처럼 함성을 내지르며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아킬레우스가 전투에서 물러나 있던 동안 배들 곁을 맴돌던 억눌린 힘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습니다.
파트로클로스가 먼저 창을 던져 파이오니아 지휘관 퓌라이크메스를 쓰러뜨리자, 그를 따르던 파이오니아 동료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고 트로이아군 전체가 순식간에 동요합니다. 반쯤 타들어간 배의 불길은 꺼지고, 트로이아인들은 차마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파트로클로스의 대활약과 여러 전사
전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도메네우스는 에뤼마스의 입을 창으로 꿰뚫고, 메넬라오스는 방패 옆으로 드러난 토아스의 가슴을 찔러 쓰러뜨립니다. 메게스는 도망치려던 암피클로스의 허벅지를 공격해 제압합니다.
안틸로코스가 아튐니오스의 옆구리를 찌르자, 동생을 잃은 마리스가 분노해 달려듭니다. 그러나 트라쉬메데스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립니다. 오일레우스의 아들 아이아스는 혼란에 빠진 클레오불로스를 사로잡아 칼로 처단합니다.
페넬레오스와 뤼콘은 창이 빗나가자 칼을 뽑아 맞붙고, 결국 페넬레오스가 뤼콘의 목을 베어 쓰러뜨립니다. 트로이아군의 우두머리들이 잇달아 쓰러지자 병사들은 참호를 넘어 달아나고, 파트로클로스는 그 뒤를 맹렬히 추격합니다.
사르페돈과 파트로클로스의 격돌
이 혼전 속에서 사르페돈이 뤼키아인들을 독려하며 나섭니다. 두 사람이 맞붙으려 하자 제우스는 아들이 죽을 운명임을 슬퍼하며, 그를 전장에서 구해 고향으로 보낼지 헤라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헤라는 사르페돈을 구하면 다른 신들도 전장에 나선 자식들을 구하려 할 것이라며 만류하고, 제우스는 결국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파트로클로스는 사르페돈의 유능한 부하 트라쉬멜로스를 먼저 쓰러뜨린 뒤 사르페돈과 정면으로 맞섭니다. 사르페돈이 던진 창은 파트로클로스를 빗나가 애마 페다소스에 꽂히고, 두 번째 창도 파트로클로스의 왼쪽 어깨 너머로 날아가 빗나갑니다. 결국 파트로클로스의 창이 사르페돈의 심장 둘레를 꿰뚫습니다.
사르페돈의 유언과 글라우코스
쓰러진 사르페돈은 절친한 벗 글라우코스에게 뤼키아인들을 모아 자신의 시신과 무장을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창수로서, 저돌적인 전사로서 기필코 나서달라며, 만약 아카이아인들이 쓰러진 자신에게서 무장을 벗겨간다면 그것이 글라우코스에게 평생의 굴욕과 수치로 남으리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둡니다.
화살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글라우코스는 심장이 흔들릴 만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폴론에게 상처를 다스려달라 간절히 기도해 통증을 가라앉히고 즉시 뤼키아인들의 우두머리들을 분기시켜 시신 주위로 불러모읍니다. 이에 앞서 제우스는 죽음을 앞둔 아들을 애도하며 대지에 핏빛 빗방울을 뿌립니다.
사르페돈의 시신을 둘러싼 쟁탈전과 제우스의 결정
시신을 둘러싸고 격렬한 육박전이 벌어집니다. 사르페돈의 전우 에피클레스가 거대한 아이아스가 던진 바윗돌에 쓰러지고, 메리오네스와 아이네이아스도 서로 창을 겨눕니다.
마침내 아카이아군이 시신을 차지해 무장을 벗기고, 파트로클로스는 그 무장을 배로 보내도록 합니다. 이후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명해 사르페돈의 시신을 전장에서 안전하게 옮기도록 합니다. 강물로 몸을 씻기고 암브로시아를 바른 뒤 신들의 옷을 입혀, 타나토스(죽음)와 휘프노스(잠)라는 쌍둥이 신을 시켜 고향 뤼키아로 운구하게 합니다.
신도 피하지 못한 자식의 죽음 (헤이토비의 시선)
이번 B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제우스가 대지에 핏빛 빗방울을 뿌리는 장면입니다. 최고의 신조차 아들의 죽음을 막지 않고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는 사실이 묘한 위로처럼 다가왔습니다. 사르페돈을 구하면 다른 신들도 자식을 빼내려 할 것이라는 헤라의 경고를 떠올리면, 제우스의 침묵은 신들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고통스러운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사르페돈의 시신을 씻기고 옷을 입혀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장면도 오래 남았습니다. 참혹한 전장에서도 죽은 자를 향한 예우만큼은 끝까지 지킨다는 점이 16권에서 가장 시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다음 편으로
사르페돈을 쓰러뜨린 파트로클로스는 이제 멈추기 어려운 기세로 트로이아 성벽을 향합니다. 하지만 승리에 가까워질수록 아킬레우스의 당부에서는 멀어집니다. 다음 C에서는 빌려 입은 갑옷과 함께 비극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파트로클로스의 마지막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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