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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12권 B, 사르페돈의 흉벽, 헥토르의 성문

by 헤이토비 2026. 9. 8.

트로이아 전쟁의 향방을 가른 하루, 아카이아 진영의 마지막 방벽이 뚫립니다. 사르페돈은 흉벽을 손수 뽑아내며 길을 열었고, 헥토르는 바위 하나로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말을 향해 치닫는 두 영웅의 하루를 정리해봅니다.



사르페돈, 글라우코스를 독려하다


사르페돈은 글라우코스에게 묻습니다. 뤼키아에서 사람들이 왜 자신들을 신처럼 우러르며 상석과 좋은 몫의 고기, 가득 채운 술잔으로 대접하는가를. 그 극진한 대접에는 이유가 있으니, 뤼키아 백성들 앞에 나가 선두에서 맹렬한 전투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전쟁을 피한다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이라면 자신도 앞장서지 않겠지만, 인간에게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무수히 놓여 있으니, 나아가 남에게 명성을 주든 자신이 얻든 하자고 말합니다. 글라우코스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뤼키아인들의 큰 무리를 이끌고 방벽을 향해 나아갑니다.

메네스테우스의 다급한 전언


방벽으로 몰려드는 뤼키아인들의 거대한 무리를 본 메네스테우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자신의 탑을 지켜줄 만한 장수를 찾아 눈을 돌리던 그는, 막사 앞에 나와 있던 테우크로스와 두 아이아스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전투의 함성과 방벽에 부딪히는 굉음이 워낙 커서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메네스테우스는 전령 토오테스를 보내 아이아스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합니다. 소식을 들은 아이아스는오일레우스의 아들에게 자신이 있던 자리의 방어를 맡긴 뒤 테우크로스와 함께 메네스테우스가 있는 쪽으로 서둘러 향합니다.

아이아스와 테우크로스의 반격


아이아스는 사르페돈의 동료인 에피클레스를 커다란 돌덩어리로 내리쳐 쓰러뜨리고, 테우크로스는 활을 당겨 글라우코스의 팔을 명중시킵니다. 화살을 맞은 글라우코스는 전열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아카이아인들이 이를 알아채고 기세를 올릴까 염려하여 남몰래 방벽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동료가 물러나는 모습을 지켜본 사르페돈은 마음속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테스토르의 아들 알카마온을 창으로 찔러 쓰러뜨리며, 물러난 자리를 자신의 분전으로 메워냅니다.

사르페돈, 흉벽을 뽑아내다


사르페돈은 억센 두 손으로 방벽 위의 흉벽을 통째로 붙잡아 뽑아냅니다. 흉벽이 뜯겨 나가자 방벽 위쪽이 훤히 드러났고, 그 틈으로 많은 병사들이 밀고 들어갈 길이 열립니다. 이를 본 아이아스와 테우크로스가 함께 맞섰고,
테우크로스는 활을 쏘아 사르페돈의 가슴 언저리에 있던, 방패를 거는 빛나는 가죽끈을 정확히 맞혔습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물리쳐 주었고, 아이아스는 창과 방패로 거세게 밀어붙였지만 방패를 끝내 뚫지는 못한 채 사르페돈을 밀어내는 데 그칩니다. 흉벽에서 조금 물러났지만 완전히 퇴각하지 않은 사르페돈은 뤼키아인들에게 더욱 맹렬히 싸우라고 명합니다.

헥토르, 성문을 부수다


제우스가 헥토르에게 더 큰 영예를 내리기로 마음먹자, 그는 평소라면 장정 둘이 힘을 합쳐도 들기 힘든 커다란 바위를 손쉽게 집어 듭니다. 헥토르는 이 바위를 관문의 정중앙을 향해 힘껏 내던졌고, 그 충격으로 문짝을 지탱하던 두 개의 축이 함께 부러지며 빗장도 버티지 못한 채 문짝이 산산조각 납니다.

부서진 문 사이로 헥토르는 두 자루의 창을 손에 쥔 채 뛰어들었고, 얼굴에는 밤과 같은 어둠이 서려 있어 신이 아니고서는 그를 막을 자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가 트로이아인들에게 방벽을 넘으라 명하자, 병사들은 방벽을 타넘거나 부서진 관문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갑니다.

누군가의 벽은 누군가의 명예가 된다 (헤이토비의 시선)


사르페돈이 흉벽을 뽑아내고 헥토르가 성문을 부수는 장면은 통쾌한 돌파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아카이아인들에게 그 방벽은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라, 배와 귀향길을 지키는 마지막 경계였습니다. 트로이아군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열리는 순간이지만, 방벽 안의 사람들에게는 물러설 곳이 더 줄어드는 순간입니다.

사르페돈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앞장서 명예를 얻자고 말합니다. 그 말은 멋있지만, 결국 그 명예는 다른 이들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배까지 불태우려는 싸움 속에서 얻어집니다. 사르페돈의 용기가 스스로 택한 것이었다면, 헥토르의 파괴는 제우스가 실어준 힘에 더 가깝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 장면을 읽으면 영웅의 명예가 대개 누군가가 지키려던 삶의 자리 위에 세워진다는 생각도 듭니다.

12권 B를 덮으며


사르페돈이 손수 흉벽을 뽑아 방벽에 첫 길을 낸 순간과, 헥토르가 바위 하나로 성문을 통째로 부순 순간은 서로 다른 방식의 돌파였습니다. 하나는 신의 아들이 몸으로 밀어낸 틈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이 힘을 실어준 파괴였습니다. 이렇게 12권은 아카이아 진영의 마지막 방어선이 뚫리는 순간으로 막을 내립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