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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일리아스》 20권 B, 안개에 가려진 헥토르와 멈추지 않는 아킬레우스

by 헤이토비 2026. 9. 22.

한편 헥토르는 아폴론이 짙은 안개로 감싸 살려 주었지만, 같은 전장에서 아킬레우스와 맞닥뜨린 다른 병사들에게는 그런 보호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신의 손길로 죽음을 피하고, 누군가는 그대로 목숨을 잃는 모습에서 신의 총애를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킬레우스의 출사표, 헥토르의 응수

아이네이아스를 놓친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아인들에게 멀찍이 서 있지 말고 한 사람씩 트로이아인과 맞붙으라고 외칩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그 많은 사람을 혼자 상대하기는 벅차지만, 손과 발에 힘이 닿는 데까지 대열을 뚫겠다고 선언합니다.

맞은편에서는 헥토르가 펠레우스의 아들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말싸움이라면 신과도 맞서겠지만 창으로는 자신보다 강한 이들과 겨루기 어렵다고 인정하면서도, 아킬레우스 역시 제 말을 모두 이루지는 못할 것이라며 맞서겠다고 말합니다. 트로이아인들이 창을 들어 올리자 함성이 솟구쳤습니다.

신의 목소리에 물러선 헥토르

그때 아폴론이 헥토르 곁에 서서 앞장서 아킬레우스와 맞서지 말고, 무리가 뒤엉킨 곳에서 기다리라고 경고합니다. 헥토르는 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군 속으로 뛰어들어 오트륀테우스의 아들 이프티온을 맨 먼저 쓰러뜨립니다. 샘물의 요정이 트몰로스산 아래 휘데에서 낳은 이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그의 머리 한가운데를 창으로 내리쳐 쓰러뜨린 뒤, 아킬레우스는 귀가이에 호숫가와 물고기 많은 휠로스강, 소용돌이치는 헤르모스강 주변이 그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이지만, 죽음은 이곳에서 맞는다고 외칩니다. 이프티온의 몸은 뒤따라오는 전차 바퀴 아래 짓밟혔습니다.

빠른 발을 뽐내던 막내의 최후

이프티온 다음은 안테노르의 아들 데몰레온이었습니다. 창끝이 투구를 뚫고 관자놀이를 찔렀습니다. 전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나던 히포다마스도 등에 창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어 눈에 띈 것은 프리아모스의 막내아들 폴뤼도로스였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해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게 했지만, 그는 빠른 발을 뽐내며 선두 대열을 오가다가 창에 맞았습니다. 창은 황금 허리띠 조임쇠와 가슴받이가 겹치는 자리를 뚫고 나왔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창자를 받아 안은 채 무릎을 꿇고 쓰러졌습니다.

세 번 안개를 찌른 창

헥토르는 동생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창을 휘두르며 나아갑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마음에 가장 큰 슬픔을 안긴, 소중한 벗을 죽인 자가 가까이 왔다고 외칩니다. 헥토르는 말로 겁주려 하지 말라며, 자신이 아킬레우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목숨이 어찌 될지는 신들에게 달려 있다고 받아칩니다.

이어 창을 던지지만 아테네가 가벼운 숨결로 되돌려 헥토르의 발 앞에 떨어뜨립니다.
아킬레우스가 달려들자 아폴론은 헥토르를 낚아채 짙은 안개로 감쌌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세 번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안개만 찔렀습니다. 네 번째로 달려들 듯 소리치며, 이번에도 아폴론이 구해주었지만 다음에 만나면 끝을 보겠다고 외칩니다.

무릎을 잡아도 소용없던 자리


헥토르를 놓친 아킬레우스는 다시 다른 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드뤼옵스와 데무코스, 비아스의 두 아들 라오고노스와 다르다노스가 차례로 쓰러졌습니다.

알라스토르의 아들 트로스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니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기대하며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칼은 트로스의 간을 파고들었습니다.

이어 물리오스와 에케클로스, 데우칼리온이 쓰러졌습니다. 트라케에서 온 리그모스와 그의 마부 아레이토오스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불길이 숲을 삼키듯 전장을 휩쓸었고, 전차의 차축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애도가 자비를 지운 자리 (헤이토비의 시선)

트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붙잡는 장면에서 마음이 멈췄습니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니 살려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킬레우스는 그의 애원을 듣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슬픔을 쏟아내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아들 앞에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헥토르는 아폴론이 안개로 감싸 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병사들에게는 그런 손길이 닿지 않았습니다. 같은 전장에서도 누구는 신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누구는 쓰러집니다. 아킬레우스의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권 B를 덮으며

20권은 신들이 전장으로 내려오고,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군을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헥토르는 아폴론이 드리운 안개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아킬레우스와 다시 맞설 순간은 멀지 않았습니다. 다음 21권에서는 싸움이 강가로 옮겨지고, 멈추지 않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마침내 강의 신까지 움직이게 합니다.

참고 자료: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