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토르가 쓰러진 뒤, 이야기는 승자의 잔혹함과 남겨진 이들의 슬픔으로 옮겨갑니다. 22권 B편에는 시신이 전차에 매달려 끌려가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프리아모스, 헤카베, 안드로마케의 통곡이 담겨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부모와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을 통해, 헥토르의 죽음이 트로이 전체에 얼마나 큰 상실이었는지도 드러납니다.

아카이아인들의 조롱과 아킬레우스의 연설
아킬레우스는 죽은 헥토르에게도 제우스와 다른 신들이 이루고자 할 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이어 창을 뽑아 한쪽에 놓고 헥토르의 갑옷을 벗기기 시작합니다.
다른 아카이아인들도 몰려들어 헥토르의 체격과 빼어난 용모에 감탄하면서도, 다가오는 사람마다 시신을 찔러봅니다. 그러면서 “타오르는 불로 배를 사르던 때에 비하면 지금 그를 다루는 건 너무 부드럽다”고 조롱합니다.
갑옷을 모두 벗긴 아킬레우스는 전우들에게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트로이아인들이 계속 싸우려 하는지, 아니면 도시를 버릴 것인지 시험해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곧 배 곁에 울어주는 이도 없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누워 있는 파트로클로스를 떠올립니다. 그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배로 돌아가 헥토르의 시신도 함께 가져가자고 외칩니다.
전차에 매달려 끌려가는 헥토르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두 발 뒤꿈치에서 복사뼈까지 힘줄을 뚫고 쇠가죽 끈을 꿰어 전차에 묶습니다. 머리는 땅에 끌리도록 그대로 둡니다.
헥토르의 이름난 무장을 전차에 실은 그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아갑니다. 시신이 끌려가자 흙먼지가 일고, 한때 그토록 아름다웠던 헥토르의 검은 머리칼은 양쪽으로 흩어진 채 먼지 속에 처박힙니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헥토르가 고향 땅에서 적들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도록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프리아모스의 오열
헥토르의 머리가 흙먼지에 더럽혀진 모습을 본 헤카베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빛나는 베일을 벗어 던지며 울부짖습니다. 프리아모스도 비통하게 신음하고, 트로이성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듯 백성들의 통곡이 이어집니다.
넋이 나간 프리아모스는 다르다노스 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가려 합니다. 사람들이 간신히 붙잡자 그는 흙먼지 속에 뒹굴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이름 부르고, 자신을 아카이아인들의 배로 보내달라고 애원합니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도 자신과 같은 나이 든 아버지 펠레우스가 있으니, 혹시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고 가엾게 여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수많은 아들을 잃었지만 헥토르를 잃은 슬픔은 그 모든 슬픔보다 크다며, 아들이 자신의 품에서 죽었다면 헤카베와 함께 실컷 울어주기라도 했을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헤카베의 통곡
프리아모스에 이어 헤카베도 트로이 여인들 앞에서 큰 소리로 통곡합니다. 그녀는 헥토르가 살아 있는 동안 밤낮으로 자신의 자랑이었으며, 도시의 모든 남녀에게 구원자이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광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사람들은 헥토르를 신처럼 받들었지만 이제 죽음과 운명이 그를 따라잡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통곡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아내 안드로마케는 아직 남편의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드로마케의 혼절
안드로마케는 높은 궁의 안쪽 방에서 검붉은 두 겹 천을 짜며 꽃무늬를 넣고 있었습니다. 싸움에서 돌아올 헥토르를 위해 시녀들에게 큰 솥을 불 위에 걸고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분부한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성탑에서 들려오는 울음과 비명을 듣고 몸을 떨며 손에 들고 있던 북을 떨어뜨립니다. 시녀들과 함께 성벽으로 달려간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의 시신이 아카이아인들의 배 쪽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진 안드로마케는 뒤로 쓰러져 정신을 잃습니다. 머리에서는 머리띠와 이마 장식, 그물 모양의 머리쓰개와 베일이 흩어져 떨어집니다. 그 베일은 헥토르가 많은 혼인 예물을 치르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아프로디테가 내어준 것이었습니다.
안드로마케의 애가, 아스튀아낙스의 운명(헤이토비의 시선)
안드로마케의 애가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헥토르의 죽음보다 어린 아스튀아낙스였습니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좋은 고기를 받아먹고 유모의 품에서 잠들던 아이가, 이제는 잔칫집에서 어른들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합니다. 누군가 잔을 내밀어도 입술만 적실 뿐이고,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헥토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아내는 남편을 잃고, 어린아이는 앞으로 누려야 할 삶까지 빼앗겼습니다. 영웅들의 명예와 승리를 이야기하던 전쟁이 이 대목에서는 남겨진 가족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안드로마케가 헥토르의 옷을 모두 불태우겠다고 말하는 장면도 오래 남습니다. 다시 돌아와 입을 사람이 없으니, 옷이라도 태워 마지막 영광으로 바치려는 마음이 참 서럽게 다가옵니다.
22권 B를 덮으며
헥토르의 죽음은 트로이의 몰락을 예고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헤카베는 트로이의 자랑을, 안드로마케는 남편과 아들의 앞날을 잃고 통곡합니다. 그중에서도 어린 아스튀아낙스를 걱정하는 안드로마케의 애가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전쟁은 죽은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까지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호메로스,《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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